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들은 것

귀에 꽂히는 말 가슴에 꽂히는 말

알퐁 2021. 10. 30. 09:39

어릴 때 난 참 게을렀다. 설겆이 하라고 시키면 미루고 미루다 더이상 피할 수 없을 때 간신히 하고 빨래하기 싫어서 같은 옷을 계속 입고, 청소하기 싫어서 모든 것을 벽에 걸고 사는 식이었다.  

엄마는 자꾸 시키면서도 그런 날 보고 "게으르게 사는 것도 괜찮아. 시집가면 질리게 할 테니 쉬어라" 하곤 했다.

 

그러면서도 엄마는 간교했다. 물론 당신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결과가 그렇다.

늘 내게 "내가 우리 알퐁 때문에 산다. 내가 너무 힘이 들어서 이걸 어쩌나 하면 네가 뿅 나타나서 해줬어.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어" 했다.

그렇다. 내가 설겆이를 한 것은 더러운 게 싫어서가 아니고 힘든 엄마가 할까 봐였다.

 

좀더 나이가 들어 그때 엄마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졸지에 딸 셋이 한꺼번에 생겼을 때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지 하는 원칙을 세운 것은 별로 없었다. 하지만 첫째 아침은 웃는 얼굴로 맞자, 둘째 애들한테 절대 내가 너희들 때문에 산다는 말은 하지 말자 마음먹었다.

 

더 나이가 들어 보니 애들 때문에 산다, 곧 어려움을 헤쳐나간다는 말은 맞다. 그래도 여전히 그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믿는다. 

그 말이 아이들에게 멍에가 될 수도 있으니까.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나 첫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니까. 

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.

엄마가 자기 삶을 나름 만족하며 사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백 마디 말보다 좋은 가르침일 거니까.

 

몇년째 해마다 한 번씩 어느 대학 설문조사에 응하고 있다. 추적조사 같다.

여러 항목들이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데 특히 난 나 자신에 만족하는가를 돌아보게 한다.

덕분에 엄마 말도 되새겨봤다. 가슴에 꽂힌 말인가 보다.

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해가 갈수록 중간, 난 모르겠어에 답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.

물음은 같은데.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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